시집 추천: 김상미 시인님의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예요
- 작가 소개
부산 출생. 1990년 『작가세계』로 시인 등단.
시집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검은, 소나기떼』, 『잡히지 않는 나비』,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산문집 『아버지, 당신도 어머니가 그립습니까』, 사랑시 모음집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한 당신』 등이 있다. 박인환 문학상, 시와표현 작품상 수상
- 느낀 점
습기를 머금은 칼날 같은 말들을 종이로 꼭꼭 숨긴 것 같다. 해맑은 어투로 말하고 있지만 그 안의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다른 예술 작품에서 영감을 많이 받으신 것 같았다. 주로 미술 관련한 시어가 많이 등장했다. 또한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며 또 다른 나를 위로하고 사랑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 시집 소개
문학동네 시인선 아흔두 번째로 김상미 시인의 시집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를 펴낸다. 1990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했으니 올해로 시력 27년차, 그새 시인이 품은 시집은 이번 신작까지 포함하여 단 네 권. 게을렀다고 하기에 그간 김상미 시인이 우리 문단에 선보인 시들의 존재감은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고 깊어 아무래도 시와의 팽팽한 샅바 싸움에 시간을 충분히 소요한 까닭이겠거니 하게 된다. 그건 뭐 시를 보면 알 일인데 무엇보다 시 한 편 한 편에 내재된 살아 있음의 형용이 탁월하게 빛난다. 이토록 입말 글말을 예쁘게 또 천진하게 참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이가 있을까. 더군다나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에 미치는 기적을 매일같이 기록하는 사람. 그런 시인 김상미. 세 번째 시집에서 네 번째 시집으로 건너오기까지 14년의 시간 동안 시인은 아주 사소한 데서 기쁘고 행복하며 슬프고 아픈 일들을 찾고 모아 왔는데,그 결실들에 안도하는지 이리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오, 아름다운 나날들’이었다고.
누구보다 발랄하고 누구보다 솔직하고 누구보다 긍정적인 사유 속 내지른 시편들이라지만 종국에는 냉정이 비치고 냉기가 서린다. 내내 뜨거웠다가 막바지에 차가워지면서 지르는 한마디의 무시무시함을 시인은 칼처럼 지니고 있다. 은장도가 아니고 과도도 아니고 도루코 면도날 같은, 종이에 싸면 도저히 모를, 작디작지만 예리한 칼날. 한껏 신나게 뛰놀게 하다 시무룩하게 뒤돌아 집에 가게 만드는 시들의 힘은 결국 자기 속내를 들여다보는 계기를 만들어주어서일 텐데, 마치 거울을 보듯 우물을 보듯 휴대폰 카메라 속 나를 보듯 군데군데 여러 대목에서 우리의 얼굴을 비춰 우리들의 살갗에 닭살을 일게 한다. 당신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라고? 먼저 묻는 것이 아니라 나 이렇게 살고 있는데요, 당신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라고? 묻는 시집. 나도 깔 테니 너도 까라는 시집. 발문 형식으로 쓰인 우대식 시인의 해설이 이 시집 읽기에 더한 흥미를 돋워준다.마지막 한 장까지 내내 붙들어주시기를!
- 시인의 말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
검은, 소나기떼
잡히지 않는 나비
그리고 14년 후,
네 번째 시집을 묶는다.
오래된 시와 최근의 시
오래된 나와 최근의 나
끝내기 위해서 다시 시작하는 봄처럼
모두 이곳에 모여 있다.
아주 사소하지만
기쁘고, 행복하다.
시와 함께 계속되는 ‘오, 아름다운 나날들’이
진심으로 화창한 봄날의 외출을 청하고 있다.
고맙다, 정말 고맙다.
2017년 봄날
김상미
- 인상 깊은 구절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나는 내 사랑의 이로
네 속에 남은 한 줌의 삶
흔쾌히 베어 먹는다
-오렌지 중 일부분 발췌
남몰래 울다 미술 시간에 발견한 뭉크의 <사춘기>
엔젤피시를 닮은 너무나도 작고 창백한 소녀
나는 얼른 그 소녀를 내 머릿속 수족관에 넣어버렸지요
...
그러니 이제는 누구도 내 소녀를 삼키지 말아요
소녀는 소녀끼리 서로서로 아껴주며 어른이 되어야 해요
꿈꾸는 어른
-엔젤피시 중 일부분 발췌
그리고 그것은 피바람으로 이루어진 성채(城砦)이다.
그 피를 다 쏟아내지 않으면 새날은 결코 밝아오지 않는다.
불후의 명작은 그 너머에 산다. 인간의 비극으로 철저히 변장한 신(神)들만이 그곳으로 갈 수 있다.
-해변의 카프카 중 일부분 발췌
마르크스가 죽은 해 카프카는 태어났지만
카프카가 죽은 해 나는 태어나지 못했어요
입 밖에 내지 못할 어둠 속에 그냥 누워서
입속에서 죽어버린 내 사랑만 탓하고 있었어요
-읽어줘요, 제발 중 일부분 발췌
이따금 사람들은 책 밑에서 토론을 한다. 나무 그늘 밑에서 토론하듯.
그럴 때 책 속의 언어들은 바람처럼 우리들 내부로 시원하게 불어오기도 하고
태풍처럼 비바람을 몰고 오기도 한다.
...
때로는 행복한 책 한 권 때문에
임종을 앞둔 수술대 위에서도 죽지 않는 책을 꿈꾸고 공유하고 싶은 법.
-죽지 않는 책 중 일부분 발췌
오성의 드높은 담장 단번에 밀치고 들어오는 놀라운 명랑에
자연스레 내 온몸 빠져들기를 원해요
아주아주 오래된, 처음과 끝 같기를 원해요
너도나도 창백한 백합꽃 같은 우울에 매달려
격조 있던 본래의 심연 구기고 구겨 뒤틀린 철갑 같은
고상 찬란한 신종 우울증
끊임없이 생산해내며 자랑스레 뻐기든 말든
나는 명랑한 게 좋아요 언제나 명랑하고 싶어요
-명랑 백서 중 일부분 발췌
너도 읽어보았니?
그들은 내일을 먹어.
우리가 매일 꿈꾸는 그런 내일이 아니라 훨씬 밝고 비싼 내일.
우리는 감히 상상도 못 할 최고급 위장과 최고급 심장을 줄줄이 단.
-글루미 선데이 아이스크림 중 일부분 발췌
누군가가 또 세상을 떠나나 보다
포르르 벌새가 날아간다
어깨를 움찔하며 애도하는 밤나무들을 보고서
그 새가 벌새라는 걸 알았다
...
그 착한 벌새가 포르르 어딘가로 날아간다
한 사람의 예쁜 영혼이 혹 저승길 잃을까
바람개비처럼 빠르게 바람을 타고 있다
-벌새 중 일부분 발췌
너와 나 사이에 복도가 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곳도 그 복도였다
...
우리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모를 때 복도로 나온다
나도 그랬고 너도 그랬다
...
우리는 그 복도에서 만나 복도를 잊고 불타올랐다
그리고 모든 일은 우리들 방에서 일어나고 우리들 방에서 끝났다
...
너와 나 사이
내 방과 네 방 사이에 있다
-방과 복도 중 일부분 발췌
죽어서 축 늘어진 병아리 날갯죽지를 쭉쭉 찢으며
병아리 피보다도 더 검붉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아이
우리들의 너무나도 외로운 한 아이
-봄날의 한 아이 중 일부분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