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추천: 손미 시인님의 양파공동체
시집 추천: 손미 시인님의 양파공동체
- 느낀 점
-같은 공간의 다른 시간의 내가 그려내는, 겹겹이 겹쳐져지는 현실 속에서 펼쳐지는 아름답지 않은 동화 같은 시라고 느껴졌다. 글자로 만들어진 미로를 헤매는 것 같았다. 현실적인 소재를 가지고 동화 같은 분위기로 풀어낸다. 동화 같은 분위기지만 따뜻하다거나 아름답지는 않다. 헨젤과 그레텔에서 빵가루와 돌조각을 따라서 길을 찾아 나서는 부분이 있는데, 그렇게 조금씩 뒤따라가는 기분이었다.
- 작가소개
2009년 『문학사상』 신인문학상, 2012년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선정, 2013~2014년 대전문화재단 차세대 artiStar 문학 부문 선정, 2013년 김수영 문학상. 시집 『양파 공동체』
- 시집 소개
양파 하나가 쪼개지는 사건 속에서 우주를 보여 주는 시인 손미의 첫 시집
사물이 영혼이 되어 흐르는 기묘하고 아름다운 마이너스 우주의 세계
2013년 제32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양파 공동체』가 출간되었다. 2009년 《문학사상》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한 손미 시인은 최근 활동하는 젊은 시인 가운데 놀랍고 신선한 자신만의 언어를 가진 시인으로 주목을 받아 왔다. “조용하고 깨끗한 풍경 속에서 사물이 영혼이 되어 흐르는 이야기, 그 영혼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또 다른 이야기라 부를 만큼 시적 언술을 증발시키는 방법이 남다른” 『양파 공동체』는 “영혼 안에 생기는, 요란스럽지는 않으나, 작으면서도 무시무시한 동요(動搖)를 가시화하는, 유리의 실금과도 같은 세계를 잘 구현”하고 있으며, “한 개의 길을 찾으려고 했는데 무수한 미로들”이 나타나고, “한 개의 열쇠를 찾으려고 했을 뿐인데 열쇠들은 무한 변용되고 증식”하는 시 세계를 보여 준다.
[민음의 시]와 [김수영 문학상]의 정신이 오롯이 녹아 있는 이 시집 안에는 섬뜩하고 생경한 이미지, 놀랍고 신선한 언어들이 꽉 찬 양파 속처럼 단단히 들어차 있다. -출판사 소개-
- 시인의 말
自序
우리 언젠가 만난 적 있지?
이 무덤 속에서.
2013년 겨울
손미
- 인상 깊은 구절
한 번씩 스푼을 저으면
내 피가 돌고
백지 위 젖은 발자국은
문고리가 된다
다른 몸으로 나갈 수 있겠다
-컵의 회화 중 일부분 발췌
정거장 없는 청룡 열차를 타고
같은 몸속을 계속 돌고 있다는 생각
내가 없는 채로 내 몸은
어디서 녹는 겁니까
자, 이제
하나씩 진실을 이야기할 시간
진실이 살해된 도시의
유일한 목격자
-진실게임 중 일부분 발췌
문 열면 무수한 미로들.
오랫동안 문 앞에 앉아 양파가 익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때때로 쪼개고 열어 흰 방에 내리는 조용한 비를 지켜보았다.
내 비밀을 이 속에 감추는 건 올바른가. 꽉꽉 찬 보따리를 양손에 쥐고
양파 공동체 중 일부분 발췌
우리, 언젠가 만난 적 있지?
이 무덤 속에서?
발신자 번호를 지운 전화가
가끔, 아주 가끔, 오는 것은
후박나무 뿌리가 전하는
잠깐의 기적
-후박나무 토끼 중 일부분 발췌
머리도 이름도 없는 나의 짐승이 울부짖는 것
너와 여자가 걸어간 길을
악사에게 말해 준 것
냉장고에 넣으면 오래 먹을 수 있는 것
한 개는 먹고 한 개는 남겨 둔 것
아끼며 핥아먹는 것
-초록 냉장고 중 일부분 발췌
추락한 후 우리는 딱 한 번 만나 시계를 똑같이 맞추고 헤어졌다
당신은 정전된 과일을 밟으며 갔다
당신이 조립한 마지막 칸
그 방에 걸려있는 그림 속
...
문을 닫으면 북반구의 어둠이 시작되고
이제 당신은 나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도플갱어 중 일부분 발췌
손을 뻗어 스르르 미끄러지는 달을 껴안았다.
내 속에서 반으로 갈라졌다가 뱅뱅 돌다 부서졌다가 다시 고이는 달.
잠시 서로의 뱃속에서 따뜻했다.
언제까지 기어올라야 우리는 만날 수 있을까.
달은 떨어질 자격이 있다 중 일부분 발췌
나는 올리브 병과 단둘이 살았다
숲은 배반해서 긴 종이 되었고
여기 있는 누구든 날 두드릴 수 있지
-몇 온스의 숲 중 일부분 발췌
네가 지나가고 붉은 달이 지나갔다
우주에서 수백억 개의 일식이 시작되고 끝났다
모두 지나갔다 중 일부분 발췌
저기
흑백의 코끼리가
거울 속 자기 모습을 이상하게 바라볼 때
우리는 한 번쯤 부드러운 지구로 여행을 가자
그곳에 박제된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는
누가 있다
-누가 있다 중 일부분 발췌
나는 가장 높은 곳에서 우산을 접고 기다리고 있어.
모든 문을 잠가도 한 번씩 형광등이 흔들리는 건, 저쪽에서 네가
꽝. 꽝. 공복의 식탁을 치기 때문이지.
물개 위성 중 일부분 발췌
이제 막 아가미가 생긴 개를 만났다
물속에서 척추가 없는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걸어 다니는 물고기
절벽을 따라 내려가 전조등을 켰다
그래서 물 밖에선 그토록 숨이 막혔던 거지
-누구도 열 수 없는 병 속에서 중 일부분 발췌